홍콩은 광물이나 석유와 같은 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아니다. 바위가 많아 대부분의 지형이 농사짓기에 어려웠다. 그러나 중국 본토와 앞바다의 큰 섬 사이의 공간이 있어 항구 입지를 제공했다. 16세기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홍콩에 기지를 세우고 중국과 무역을 시도했으나 명나라의 쇄국정책으로 기지가 없어졌다. 18세기 영국 무역업자들이 홍콩을 다시 찾았고 19세기에 아편전쟁으로 2차 세계대전까지 영국의 땅이 되었다.
홍콩이라는 이름은 향기 나는 항구라는 뜻을 갖는다. 부두에 죽 늘어서 있던 향 제조 공장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무역으로 향신료를 많이 교역하던 지역이라 그렇게 부른다는 말도 있다. 영국에게 홍콩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무역의 기지였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으로 더 이상 방어하기 힘들어졌다. 처칠은 '지키기 어려운 곳에 자원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을 했다. 1941년에 일본은 선전포고도 없이 홍콩을 침략해 순식간에 점령해 버렸다. 4년의 엄격한 계엄령이 시행되는 동안 홍콩은 가난에 시달렸다.
프랭클린 김슨은 일본 침략 이틀 전에 홍콩 식민 장관에 취임했다. 전쟁 내내 일본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1945년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자마자 그곳에서 나와 자신의 홍콩의 총독 대행임을 선포했다. 그는 보름 만에 행정을 정상화했으며 중국이나 미국이 어떤 입김을 불어 넣기 전이였기에 홍콩의 운명은 바뀌었다. 다시 영국의 영토가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은 많은 식민지를 포기하였지만, 홍콩만은 중국에 합병될까 우려해 놓지 않았다. 영국의 공무원들을 보내 홍콩의 정상화에 힘썼으며 그중 한명으로 스코틀랜드 출신 존 제임스 카우퍼스웨이트였다.
그는 에든버러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고전학을 전공하고 세인트앤드루스대학에서 경제학도 공부했는데 계몽주의 사상, 특히 애덤 스미스의 사상에 정통하게 된다. 1951년 홍콩 재무 차관이 되고, 1961년에는 재무장관으로 임명된다. 그의 전기를 쓴 닐 모너리는 '홍콩 경제정책은 절대적으로 그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라고 표현할 정도로 그의 재직 기간에 홍콩은 전 세계에서 가장 놀랄 만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이 놀라운 경제성장의 핵심은 바로 홍콩의 세금 정책이었다.
카우퍼스웨이트 일행은 1945년 말 홍콩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산업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데 힘썼다. 총독은 홍콩을 자유무역항으로 선언했다. 몇몇 상품을 제외하고는 관세가 없었고 수출보조금도 없으며 수입 금지 품목은 최소화했다. 그러자 수출입이 재개되면서 전쟁을 피해 탈출했던 사람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무역량이 급속하게 늘었고 경제가 자기 스스로 회복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힘썼던 카우퍼스웨이트는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길을 걷거나 공장과 항구 등을 돌면서 경제활동을 자세히 관찰했다. 보면 볼수록 공무원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데도 경제는 발전하고 있었다. 그는 경제 계획 같은 건 필요 없다고 결론을 지었다. 홍콩 시민과 사업회사들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두 번째 임무는 식료품과 연료의 구매, 판매, 분배 및 가격통제를 통해 홍콩에 필수 물자를 공급하는 부서를 관리하는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부서는 문제가 많았다. 어떤 문제였는지는 모너리의 말을 빌려 설명하겠다. '이때의 경험으로 그는 공무원 집단은 상행위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관료들을 저평가하였다. '잘못하면 손해를 몽땅 감당해야 하는 사람만이 제대로 된 상업적 판단을 할 수 있다.', '정부가 비즈니스를 하면 그 누구도 수익을 내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는 후에 '긍정적 불개입(positive non-intervention) 이론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이론의 내용은 개방경제 하에서 정부의 간섭은 득보다 실이 많다는 것이다. 신중한 검토 끝에 꼭 간섭할 필요가 없으며 기본적으로 정부는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관료의 서투른 개입'이 경제의 '미묘한 메커니즘'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애덤 스미스의 사상을 정통한 그는 '숨겨진 손'의 작용을 믿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얽히고설킨 수많은 요인을 잘 알지도 못하고 통제하고 싶어만 하는 융통성 없는 정부나 무슨 위원회의 일회성 결정보다는 경영자와 기업가의 개별적인 결정이 모이면 훨씬 현명하고 좋은 결과를 낳는다'라고 말했다.
홍콩의 세금 정책은 동시대 영국 세금정책과 정반대였다. 영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는 높은 세율과 과다한 정부 지출, 적자재정 편성, 시장 개입 등을 실시하고 있었지만 홍콩은 완전히 반대로 행했다. 일부 부유층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민은 소득세를 한 푼도 내지 않았다. 고소득자조차 15%에 불과한 세율을 적용받았다. 관세, 판매세, 양도세,이자소득세,해외소득세도 없었다. 단, 토지세는 있었는데 어떤 경우에도 조세부담률은 GDP의14%를 넘지 않았다.
그는 '소득세와 관련해서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는 방식의 징수체계가 경제 전반, 특히 국내 해외 기업 모두의 투자 결정과 기업의 활동에도 좋은 영향을 준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국가부채 또한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가의 채무가 늘어나면 세금이 늘어날 수 밖에 없다. 미래의 후손들에게 채무를 물려주어도 된다는 생각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선조들은 우리에게 그 어떤 채무도 물려주지 않았다.'
산업 계획이나 보조금, 정부 개입도 하지 않았다. 스웨이트는 '솔직히 나는 몇몇 선택된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국가 계산을 사용하는 법안에 반대합니다. 특히나 관료들의 호불호 기준에 따라 대상자가 선정된다면 더욱 반대합니다. 어느 누구도 개발의 우선순위를 정할 만큼 과거,현재,미래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람직한 경제라면 정상적인 시장 상황에서 특별한 지원 없이 스스로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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