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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은 어떻게 발전할 수 있었는가 _ 세금의 역사(2)

by 리부냥 2024.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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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은 한마디로 어떠한 형태의 자본 통제도 없는 상태였다. 그는 '언제든지 떠날 수 있기 때문에 국외 자본이 홍콩에 유입되어 머무는 것이다. 여러 규정을 만들면 자본이 유출되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홍콩은 당시 투명한 민주국가는 아니었다. 그곳은 영국의 식민지였다. 총독은 입법회의 의견을 참조하여 법을 제정하고 강제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권력을 남용하면 이런 체제는 쉽게 부패한다. 하지만 카우퍼스웨이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많은 공무원들은 홍콩 시민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일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협의형 정부를 원한다면 결정까지 복잡한 단계를 거쳐야 하고 시간도 많이 소요된다. 신속한 정부를 원한다면 어느 정도 독재를 받아들여야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정부 결정과 자신의 생각이 일치한다면 신속한 정부를 더 선호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정책을 펼 수 있었던 것은 홍콩이 처한 독특한 상황 때문이었다. 재건이 필요했고, 케인스 이론에 기반해 정책을 펴는 유럽 국가들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누구에게도 정책 시행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는 특이한 상황 때문에 가능했다. 영국은 전반적으로 홍콩이 재량껏 운용하도록 놔두었다. 삼박자가 맞은 것이다.



 또한, 그의 특이한 정책 중 하나로 통계를 내지 않는 것이 있다. 그는 공무원들이 통계치를 보면 경제에 간섭하여, 문제가 아닌데 공원들이 보기에는 문제처럼 보여 이를 해결하려 함으로써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nvisible hand) 작용을 방해한다고 믿었다. '공무원들이 통계를 손에 쥐면, 그걸 가지고 계획을 세우려 할 겁니다 적 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난 1945년의 홍콩은 궁핍했고 매우 절망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렸다. 전쟁 전 100만 명이던 인구는 60만으로 감소했다. 하지만 불과 한 세대가 안 되는 짧은 기간에 내세울 만한 천연자원조차 없던 이 작은 도시가 세계에서 가장 분주한 항구가 되었고 국제금융의 강자로 떠올랐으며 인구는 10배 이상 팽창하게 되었다.


 1950년대 본토의 내전을 피해 이주했던 사람들에게 홍콩은 초라한 소도시에 불과했다. 프리드먼은 1955년 홍콩을 방문했을 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난민을 수용하기 위해 정부가 급하게 지은 임시 숙소는 앞면이 뚫린 원룸을 성냥갑처럼 쌓은 형태였다. 한 가정당 원룸 하나씩.' 하지만 오늘날 홍콩은 미래지향적 도시 국가가 되었다.
홍콩의 부도 이와 유사하게 엄청난 속도로 증가하였다. 1940년대의 GDP 데이터는 당연히 없지만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300달러 미만으로 추정된다. 



 1960년대에는 (카우퍼스웨이트가 아닌 OECD에 따르면) 429달러였다. 같은 시기에 영국은 1,380달러였고 미국은 3,007달러였다. 그 후 33년 만에 1인당 GDP는 영국을 추월했고 50년 후에는 미국을 능가했다.



 이 기간 동안 세금은 낮았으며 정부는 최소한만 지출했다. 1946년 이후 한 차례만 제외하고 모두 흑자재정을 달성해서 보통 1년 동안 쓸 만한 돈을 비축했고 어떤 국가 채무도 발생시키지 않았다. '현 세금 제도하에서 우리 경제가 성장하리라고 굳게 믿고 있지만 지금처럼 낮은 세율에도 국가 재정수입이 증가하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라고 카우퍼스웨이트는 말했다. 2015년까지 연속 8년간 재무장관이 잉여금을 과소계상 하는 것이 연례행사처럼 되어버렸고 2018년에도 같은 일이 발생했다. 



 자유방임정책은 보통 무자비하고 인정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카우퍼스웨이트는 자신의 정책이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그에게 세금은 부담이며 성장의 장애물이었다. 세금이 적을수록 이익이 늘어나고 경제는 더 성장하게 된다. 경제성장은 더 많은 고용을 창출하고 양질의 일자리와 재산 증식으로 이어진다. 그는 '부의 분배보다 부의 창출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급속한 경제성장과 이에 따라 노동력 수요가 증가하면 자연히 신속하고 실질적인 부의 재분배가 직접적으로 이루어진다'라고 말했다. 즉, 경제가 알아서 돌아가게 놔두면 부의 재분배는 저절로 달성된다는 말이다.



 그의 정책과 생각을 정리하자면 이와 같다.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면 일시적이든 영구적이든 어려움을 겪어 경제적 성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도와줄 수 있다.' 사회 최하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줘야 하는데 경제가 활황을 이루면 정부가 이들을 더 잘 도와줄 수 있다. 그는 '낮은 세율 덕분에 세수가 늘었다'라고 했다. 그의 주장이 옳았음은 홍콩의 성장이 증명한다. '국민의 손에 맡겨진 돈은 결국 국가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게다가 '이자까지 붙어서' 돌아온다.


 홍콩은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 대처해왔지만 위기가 닥쳤을 때 기본 입장은 개입이 아니라 ‘긍정적 불개입’이었다(단, 공공주택 부문은 예외다). 1950년대 홍콩의 산업은 창고업, 운송업, 조선업, 보험업 등 주로 중국 본토와 재화를 주고받는 분야에서 일어났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미국이 중국에 제재를 내리자 4년간 중국과의 무역이 90퍼센트 감소했다. 홍콩은 좌절하지 않았다. 대신 내전을 피해 내려온 이주민들이 가지고 온 방적 기술로 전 세계 섬유산업을 지배했다. 영국과 미국은 자국의 산업을 지키기 위해 강력한 보호주의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자 홍콩은 직물 대신 합성섬유 산업을 육성해서 영미의 엄격한 수입 할당제를 극복했다. 그리고 전자와 플라스틱 분야로 산업의 다양화를 추구했다. 1976년에 파운드화의 평가절하로 외환보유액이 무려 3,000만 파운드 감소했지만 홍콩은 이 역시 잘 이겨냈다. 중국의 문화혁명으로 인한 타격이나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때도 마찬가지였다.